동국문학회

230921

johyeongseob 2024. 9. 19. 22:29

제목: 여름맛 아이스크림

 

  그녀를 알게 된 건 대학교 동아리 후배의 소개였습니다. 일 년간 활동을 마침표로 찍고 취업 준비를 하던 저에게 친한 동생이 밥을 먹자로 연락이 왔습니다. 개강하고 처음 본 저희는 자주 가던 학교 앞 백반집에서 파불고기 2인분을 주문한 후에 서로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방학에 알바를 했다. 이번 학기는 시간표가 망했다.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후배가 저에게 대뜸 물었습니다. "형은 왜 동아리를 나간 거예요?" 적응을 잘하던 제가 올해 초 동아리를 갑자기 그만둔 것이 많이 서운했나 봅니다. 주변에 비슷한 질문을 하던 지인들에게 '졸업반이 되었으니 슬슬 취업 준비해야지'라고 대답하듯 후배에게도 비슷하게 대답을 했지만 끈질기게도 물어 당기더군요. "에이 동아리 사람들 다 취업 잘하던데 그건 변명이죠."라고 하는 동생에게 저는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학기 때 좋아하던 동아리 선배에게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녀와 이어지지 못해서 나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후배는 제 대답을 듣고 처음에는 벙찐 표정을 짓다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장난만 치던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나 봅니다. 이후 파불고기에 볶음밥까지 시킨 저는 기어이 소주를 한 병, 두 병 비우며 취할 때까지 속으로 오랫동안 삼킨 감정들을 털어놓았습니다. 해가 지고 식당을 나온 저는 주량을 넘겼음에도 어떤 개운함을 느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배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조만간 한 번 더 밥 먹어요'라고 말한 뒤 저희는 헤어졌습니다.

 

  이틀 뒤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I라고 하는 친구와 함께 셋이서 밥을 먹자고 하더군요. 저는 후배에게 I양이 누구냐고 물어봤습니다. "걔는 형을 알던데요?"라고 대답한 후배는 I양에 대해 제가 작년 동아리에 있었을 때 같이 놀았던 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아 그 당시에는 제가 한 명만 보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의를 주지 못했나 봅니다. I양은 제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데 저는 그녀를 알지도 못했다니, 갑자기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밥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가오는 금요일에 저희는 단골 백반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약속날 저녁 식당에서 만난 저희는 늘 먹던 메뉴 3인분을 주문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능청스럽게 "I양 그간 잘 지내셨나요?"라고 물어보니 I양은 웃으며 제게 '저 까먹으신 거 이미 다 들었어요'라고 대꾸하였습니다. 이후 분위기가 편해진 저희는 술을 주문했고 I양은 작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제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 듣다 보니 기억이 저편에서 올라왔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함께 했던 날들을 셋이서 공유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즐거웠던 동아리 추억을 꺼내서인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후 그녀와 저는 금방 친해져서 밥도 같이 먹고 학교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도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취업 준비를 한다고 말하니 그녀도 최근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저희의 일과가 비슷해진 게 친해진 이유일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이면 저희는 학교 근처 공원에 자주 산책을 가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벚꽃이 지고 푸른 녹음만이 무성한 6월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놀러 가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노을이 지는 어느 저녁에 배가 부른 저희는 늘 그러듯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앞서 걷던 그녀의 새하얗고 조그만 손이 이상하게도 제 눈에 계속 밟히더군요. 기분 좋게 공기를 만끽하던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저는 무심코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잠깐 당황하던 그녀는 제게 왜 손을 잡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추워서 그랬다고 얼버부리니 갑자기 그녀는 참기 힘들었는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녀는 이 날씨에 무슨 추위를 타냐고 저를 놀렸지만 다행히 손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새로운 인연이 되었습니다.

 

  사귀게 된 후 저희는 다른 연인들이 그러하듯 혼자가 아닌 둘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둘 다 학교 근처에 자취를 하고 여름방학도 시작해서 저는 마치 하늘이 저희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맑은 날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 추억을 쌓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학생이어서 씀씀이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돈을 쓰지 않고도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대해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외식을 줄이는 대신 서로의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저와 그녀 둘 다 복잡한 장소를 싫어하고 조용한 장소를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루는 그녀의 집에서, 하루는 저희 집에서 각자 집에 초대한 날은 집주인이 음식을 준비하는 걸로 약속하였습니다. 제가 찾아오는 날이면 그녀는 자주 스파게티를 만들곤 했습니다. 밥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생소한 음식이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내어주는 그녀와 함께 먹는다면 그것마저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식후에는 집주인의 강력한 의지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저희는 집안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서로를 더욱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익숙함이 저희에게 다가온 것은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갈수록 저희는 서로를 위해 조금씩 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그녀의 취향, 가치관, 생활방식, 사고관념 등 무의식에 나오는 행동들이나 말들이 마치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조금씩 저희의 관계에 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저희가 사귀고 난 후에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서 잘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 불편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어리던 저희들을 다시 각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결국 하늘에서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어느 날 헤어짐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그녀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다시 취업 준비에 몰두하였고 그 해 겨울 어느 작은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사원이 된 후 정신없이 살다 보니 다행히 그녀 생각이 점점 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와 함께 먹던 아이스크림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나면 습관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찾던 저는 동료들에게 "아이스크림 귀신이라도 붙었어?"라고 매번 놀림을 당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면 그때의 여름이 기억나서 차마 대꾸하지 못하겠더군요. 아마도 이 추억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저만 아껴서 먹고 싶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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